2018년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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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감(世界感)’을 위한 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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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민

문학평론가, CB-arte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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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종민
[편집자의 말]

이 원고는 지난 5월 3일, 〈2018 헬로우 아트랩 2차 워크숍 ‘문화예술교육 철학 전망대’〉 의 강연록입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기획자 및 예술가들에게 좋은 자극과 동기를 제공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필자의 동의를 얻어 재수록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10호(2014. 6. 23)에 처음 발표되었음을 알립니다.

 
고영직 | 문학평론가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이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passport)”이라고 한 말이 떠오르는 시절이다. 여기서 ‘문학’이라는 말 대신에 ‘예술(교육)’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무리 없을 것이다. 수전 손택이 역설한 것처럼,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억센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필요한 감수성이라고 확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은 어느 시인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라고 한 표현과도 통하는 어떤 것이리라. 이문재 시인이 쓴 「오래된 기도」라는 시를 세월호 참사 이후 자주 들여다보곤 했던 것도 그런 ‘세계감’을 기르는 감수성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나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이문재 시인의 표현에 자주 울컥하곤 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자주 던져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물음이 특히 필요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 현장에서 갈수록 ‘안전 신화’는 견고해지고 있고, 이른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처세술을 자녀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유포되고 있다는 의문이 들곤 한다. 학교 안과 밖의 교육 현장이 갈수록 경화(硬化)되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5월 복수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수영교육 활성화 방안 토론회〉 를 개최하려다 취소한 사건을 보라. 토론회를 알리는 포스터 문구에 세월호 참사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자리”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기함하는 줄 알았다. 아마도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실수도 아니고, 단순한 해프닝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이 체제 ‘바깥’을 전혀 사유하지 못하고, 전혀 상상하지 않으려는 후천적 상상력 결핍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에서 세상 자체가 위험한데 내 아이는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승리법에 불과하다. 지금 여기에 유포되는 각자도생의 처세술이란 실상 지배 세력에 의해 언제든지 ‘각개격파’ 당하기 쉬운 통치술의 한 형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 내면의 야성(野性)의 힘을 복원하려는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마치 거푸집으로 형상을 뜨듯 판에 박힌 아이들을 대량으로 주조(鑄造)하는 지금 여기의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우리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여럿 당선된 것은 그런 변화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교육 현장의 변화가 필요하다. 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던 독일 공립학교에서 수학한 인재(人才)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인재(人才)들이야말로 어쩌면 인재(人災)라는 사유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갖추고, 예의 ‘세계감(世界感)’의 감각을 느낄 줄 아는 아이들을 생각하는 문화예술교육 과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자 고병권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아이들은 어쩌면 ‘야만인’의 덕목을 갖춘 사람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법하다. 고병권은 산문집 『철학자와 하녀』에서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카바피(1863-1933)의 유명한 시를 인용하며 “너는 애국시민을 원하니? 나는 야만인을 기다린다”라고 말한다. 카바피의 시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로마제국을 멸망하게 한 역사 속 야만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병권은 이 시의 의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유한다. 나와 우리 자신을 동일자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시민들이 야만인의 도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동일자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게 되고, 제국(帝國)의 불가능성 자체를 되묻게 된 것처럼! “그들의 도래는 법과 권력의 정지이자 학자와 웅변가의 침묵이다”라고 쓴 표현에서 고병권이 왜 야만인론을 역설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법이 멈추고 말이 멈추는 시간, 법(혹은 문법)의 외부 지대에 서게 된 시간. 나는 카바피의 야만인들을 벤야민의 메시아처럼 느꼈다”라고 쓴 표현이 결코 과장이 될 수 없음을 나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후에 직시하게 된다. 지금 여기의 폐허를 응시하려면 그런 강력한 마음의 힘과 새로운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병권이 마이클 샌델 식 정의(Justice)론보다 니체 식 비르투스(virtus)의 의미를 더 강조한 맥락 또한 여기에 있을 법하다. 니체의 비르투스의 의미는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에서 요청되는 핵심적인 덕목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도대체 덕이란 무엇인가? 니체의 입을 빌려보자면, 진정한 힘, 비르투스는 내게 닥치는 운명(fortuna), 그 우발성에 기꺼이 자신을 여는 것이고, 그것을 기꺼이 다루려는 힘과 의지이다. 비르투스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친숙한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낯선 것, 내게 운명처럼 나타난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우발적으로 닥치는 타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기꺼이 개방하려는 의지와 힘 속에서 공동체는 유덕해지고 정의로워진다.
  고병권은 이 책에서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나는 위 명제의 의미에 대해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 현장 또한 더 적극적으로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경우에만 지옥에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각과 개안(開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고병권이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교육 사례를 분석하며 ‘배움 이전의 배움’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를 하라”라고 한 대혜 스님의 말을 인용해 새로운 ‘공부론’을 강조한 것도 지옥에서 철학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곁에 있어 줌’의 존재론」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보며 큰 일깨움을 얻었다는 점을 여기에 고백하려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중략)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라고 말하는 ‘있어줌’의 존재론은 결국 우리 시대 ‘교사론’의 의미와 통한다고 보아도 좋을 법하다. 미국의 위대한 교사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 우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음미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너선 코졸은 이 책을 비롯해 여러 책들에서 ‘교사론’을 역설한 진정한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수업 시간에 인종차별에 저항한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를 읽어주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고되는 등 특히 빈곤층 아이들과 수십년 동안 교육을 진행해온 교육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85년부터 가난한 아이들의 영혼을 말살하는 뉴욕 도심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학교를 찾아 25년간 아이들과 인연을 맺어온 과정을 기록한 『희망의 불꽃』(열린책들)이라는 책이 최근 국내에 소개되었다. 조너선 코졸은 교과서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불복종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론을 역설한다. 저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특정의 유․무형의 관습들과 제도들에 순치되지 않으며, 재미를 위한 상상력의 혁명을 구현하려는 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이 점에서 영국 작가 D.H.로렌스(1885-1930)의 시집 『제대로 된 혁명(A sane Revolution)』에 나오는 시들의 의미가 간단치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로렌스는 누구보다 근대의 제도와 습속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저항하려 한 작가였다. 로렌스는 저 하늘의 ‘초월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나와 우리 안의 ‘내재성’에 눈을 뜨려는 강렬한 충동과 새로운 사유에 대해 역설한다. 어느 시에서 “하느님이 태어날 때까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하느님은 태어난다」)라고 쓴 표현에서 로렌스의 예술정신을 여실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돈을 없애라」, 「제대로 된 혁명」 같은 시들에 나오는 로렌스의 전복적인 시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문화의 궤도(volution)에 진입하려는 상상력의 수원지가 되기에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자주 돈이라는 ‘마몬’을 숭배하지 않았던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_ D.H.로렌스 시 「제대로 된 혁명」 끝부분


  로렌스가 역설하는 “재미를 위한 혁명”은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이 표방하는 궁극적인 가치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교육이다. 탐욕, 몰염치, 무책임은 우리 시대의 병통이 아니던가. 협박 경제를 속성으로 하는 이런 시대에 질서 바깥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은 물론이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 또한 더 암울해질 것임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이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슬로건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우리 사회 지배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당신은 행복하신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지상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변화의 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사유와 성찰 측면에서 새로운 ‘전복’의 가치를 구현하는 상상력의 지렛대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세계감’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탄생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5월 3일, 헬로우 아트랩 2차 워크숍



조너선 코졸의 감동적인 말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우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는 교사의 빛나는 눈빛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보론]
‘시(詩)의 힘’을 신뢰하자



교양의 자멸, 지성의 패배

  지금 공부 중인가요? 이 질문은 우리가 세상을 살며 죽을 때까지 품어야 할 큰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이 없는 삶과 사회는 타자에 대한 상상을 하지 못하고, 그런 사회가 추구하는 문화와 문명은 결국 통증이 없는 문명을 의미하는 무통(無痛)문명(모리오카 마사히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고, 이 질문을 하는 힘은 공부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부는 실용적인 공부와는 조금 다른 큰 공부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앞의 생(生)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큰 질문과 관련이 있는 공부를 뜻한다. 나는 물론 실용적인 공부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공부가 사람에 따라 필요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실용적인 공부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을 꾀하는 공부일 수 있다는 점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느냐 하는 실용성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공부를 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공부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총론 식의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자주 각론 강박증을 앓아오지 않았던가. 지금 당장의 솔루션을 찾으려는 공부의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경우 문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시의 힘을 진짜 이해할 수 있는 공부를 권하고 싶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diaspora) 지식인 서경식이 지난해 출간한 『시의 힘』은 좋은 길라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의 힘』은 나를 포함해 6명의 선정위원들이 한국작가회의가 주관하는 〈작가들이 사랑한 올해의 책 2015〉 에 선정된 책이다. 서경식은 우리 시대는 “교양의 자멸, 지성의 패배”인 사회라고 진단한다. 이 표현은 물론 서경식의 ‘현장’인 일본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겠지만, 지금 여기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대입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 모두 과거사 문제 해결에서뿐만 아니라, 최근에 일어난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2011)와 4.16 세월호 참사(2014) 이후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저항”(‘한국어판 서문’)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나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적 비전 또한 보이지 않은 채 일종의 스놉의 사회로 변모하며 출구 없는 폐색의 상황에 갇힌 것으로 파악되는 두 나라 상황이 포개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 모두 폐색의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와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은 생활 보수파의 먹고사니즘 이데올로기라고 확언할 수 있다. 오로지 먹고사는 것이야말로 지상 최고라는 식의 가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어쩔 수 없음이라는 상황을 수용하며 냉소주의를 내면화한 사회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점을 성찰하지 않는 공부는 각자도생의 생존 논리일 뿐이다. 먹고사니즘과 냉소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반(反)지성주의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냉소의 문법을 철저히 따르게 된다. 이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서경식이 말하는 시의 힘에서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경식이 말하는 시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문형의 희망’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힘과 자본의 논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다음 시를 보라. “꾸며낸 혓바닥으로 /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 / 거짓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사랑을 부르짖지 마라.”라는 일본 시인 사이토 미쓰구의 「목숨의 빛줄기가」라는 시는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도 진실을 외면하며 거짓 언어를 일삼는 국가와 자본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불온한 상상력을 내장한 작품이다. 서경식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무력한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힘이란 지금 당장의 효용성을 넘어서는 차원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가 황석영이 출세작 『객지』(1971)에서 ‘동혁’의 입을 통해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고 한 의미와 통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셈이다. 어느 지면에서 서경식이 희망(希望)이란 희망(稀望)을 의미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희망은 자주 오는 게 아니라 ‘드물게’ 오는 것이 아니던가.

“어떤 시들은 강철로 쓰여진다”

  시의 힘을 신뢰할 수 있는 공부를 하자. 시의 힘을 신뢰할 줄 아는 사람은 지금 당장의 비참함과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힘을 신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이라는 말을 이른바 긍정심리학과 처세술에서 말하는 긍정주의의 맹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대체로 심리학과 처세술에서 말하는 긍정주의는 이른바 아Q식 정신승리법(루쉰)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정신승리법과 다를 바 없는 힐링이라는 말을 몹시 싫어한다. 나는 차라리 힐링이라는 말 대신에, 필링(feeling)이라는 말을 권하고 싶다. 시에서 그런 필링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함께 살자라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시는 지금 당장의 현실을 바꾸는 데는 무력했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를 바꾸는 진짜 힘은 시의 힘을 의미하는 이야기와 상징의 힘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쿠바, 베네수엘라, 코스타리카, 브라질, 우루과이 같은 21세기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혁명적 변화를 추동한 힘이 바로 시의 힘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칠레 시인 네루다, 우루과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르헨티나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페루 시인 세자로 바예호, 니카라과 시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같은 문인들이 쓴 시와 산문은 어느 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체코계-미국인 독립언론인인 안드레 블첵이 「시와 라틴아메리카 혁명」(〈녹색평론〉 134호, 2014년 1/2월호)라는 텍스트에서 열렬히 증언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시들은 강철로 쓰여진다”고 말하며, 라틴아메리카의 변화를 추동한 시의 힘에 대해 다음과 말한다.
 
우리가 승리한 것은 우리의 두뇌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 때문에, 우리의 창조적인 남자와 여자들, 타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륙 전역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때로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승리했다.


  시는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욕망을 바꾸었고, 감수성 자체를 바꾸며, 사회를 바꾸었던 것이다. 안드레 블첵은 위 글에서 욕망과 감수성을 바꾼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나를 바꾸고,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있어서 욕망과 감수성을 바꾸는 공부가 왜 중요한지를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나와 당신은 다른 사회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안드레 블첵은 말한다. “만약 한 편의 좋은 시가 번쩍이는 붉은색 ‘페라리’보다도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찬미를 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도둑질을 멈추고 시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나와 당신은 블첵이 쓴 이 문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국, 시의 힘이란 우리 안의 어떤 척도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교양의 자멸, 지성의 패배”를 말하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고 쓰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냉소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빛은 시의 희미한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서경식이 앞의 책에서 “최근 50년이라는 척도로 사회를 바라보면 상상력이, 나아가 타자에게 공감하는 공감력이 급속하게 쇠퇴했다. 그 대신 유치한 자기중심주의적 언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진단하는 사회일수록 시의 가능성을 더욱 신뢰해야 마땅하리라. 지난해 4월 작고한 위대한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평소 인간의 세포조직은 ‘분자(分子)’가 아니라 ‘이야기’로 구성되었다고 즐겨 말한 데에는 시(이야기)의 가능성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진술이었다.

새의 눈, 벌레의 눈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하려고 하는) 공부가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하는 질문이다. 올해 초 발간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칼럼집 『발언』(전2권, 녹색평론사)이라는 책은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점을 강력히 환기하는 책이다. 김종철은 2008년 5월부터 2015년까지 언론 매체에 쓴 칼럼을 모은 이 책 『발언』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책머리에’) 하는 문제의식을 행간에 부려놓는다.
  이 책에 대해 어느 지면에 짧은 글을 쓴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론하는 이유는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서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국가와 자본의 힘에 맞서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진술을 보라. “아이들이 맘껏 놀지 못하고, 건강한 성장기를 박탈당하면서 ‘교육지옥’에 갇힌 채 살아야 하는 사회, 청년들이 활기를 잃고 기껏해야 7급 공무원이나 ‘정규직’을 몽상할 수 있을 뿐인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김종철은 철저한 민주주의자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기본소득이라는 희망이 실제 구현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철저한 이행에서만 가능하고, ‘패도’의 세계에서 ‘왕도’를 구현하는 정치 또한 민주주의의 강화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김종철의 이러한 관점은 시의 힘을 철저히 신뢰하는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단적으로 일본 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 1932-2007)의 삶과 사상을 기념하며 일본에서 행한 강연을 소개한 칼럼 「‘패도’의 세계에서 ‘왕도’를 생각한다」에서 확인된다. 이 글에서 김종철은 오다 마코토의 반전 평화, 민주주의 사상은 폭격하는 자가 아니라 폭격당하는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는 태도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양심적인 인간이고자 한다면, 필요한 것은 하늘을 나는 새의 눈[鳥瞰]이 아니라 땅을 기는 벌레의 눈[蟲瞰]이다”라고 말한다. 벌레의 눈[蟲瞰]이라니! 나는 어쩌면 이 표현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식인인 김종철이 세상을 바라보는 확실한 발화(發話) 지점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부하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차원에서 깊이 음미되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공부 중이신가? 무엇을 위한 공부를 하시는가. 새의 눈을 갖기 위한 공부인가, 벌레의 눈을 가지려는 공부인가. 새의 눈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서경식의 『시의 힘』과 김종철의 『발언』을 읽으며 시의 힘을 상상하고, 우리 사는 현실을 바꾸는 진짜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결국 ‘시인’의 일과 ‘시민’의 일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나는, 지금, 책을 읽을수록 책 밖의 현실을 이해하고 바꿀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나는 학생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배움이 일어났던 순간은 언제인가. 그때의 상황은 무엇이었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2. 나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가.
3. 예년과 ‘조금 다른’ 문화예술교육을 위해서는 어떤 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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