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악의 시 「하늘만 곱구나」
1946년 12월 25일자 〈경향신문〉에 아주 짧은 기사 하나가 떴다. 요즘으로 치면, 박스 기사 같은 것이었는데, 아래와 같았다.
— 전재동포 구제 시(詩)와 음악(音樂)의 밤 —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시 지부에서는 전재동포구제사업으로 오는 26일밤 오후 6시부터 종로청년회관에서 조선음악가동맹 찬조출연과 예술신문사의 후원으로「시와 음악의 밤」을 개최하기로 되었다.
‘전재동포(戰災同胞)’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에 의해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 해외로 끌려간 우리 동포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을 말한다. 군인의 신분으로, 또는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들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1930년대 사할린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강제로 이주된 고려인들, 1920~30년대 먹을 것이 없어 남부여대(男負女戴) 북간도까지 올라가야 했던 남쪽 사람들 역시 ‘전재동포’의 대열에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다.
‘조선문학가동맹’과 ‘조선음악가동맹’은 해방 직후 급속하게 결성, 조직된 조선 최대의 예술단체들이었다. 이들 단체는 식민지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이 민족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막중한 역사적 임무를 띨 수밖에 없었다. 문학가동맹의 활동을 이끌어간 이들은 홍명희, 임화, 이태준, 정지용, 오장환, 김남천 등이었고, 음악가동맹의 사업을 지휘한 이들은 김순남, 이건우, 박기용, 김재훈, 안기영 등이었다. 이들 단체는 다른 장르의 예술단체와 함께, 짧게는 5년, 길게는 30여 년 동안 타지를 떠돌던 귀향 동포들을 맞이하여 예술활동으로 위무하고 격려하는 사업을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1946년은, 여름의 대홍수와 9월 철도 총파업, 10월 대구항쟁으로 몹시 뜨거운 한 해였다. 이윽고 겨울이 된 어느 날, 시인 이용악(李庸岳, 1914~1971)은 서울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린 <전재동포 구제 ‘시와 음악의 밤’>에 참가하여 자신의 시 「하늘만 곱구나」를 낭송했다. 이용악은 30년대 중반, 조선 문단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오장환ㆍ서정주와 함께 ‘시삼재(詩三才)’로 꼽힌 천재시인이었다. 이용악의 시는 깊고 어두웠으며, 슬프고 따뜻하였고, 안단테(andante) 또는 그라베(grave)의 운율이 있었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찾아 쫓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인 「낡은 집」후반부다. ‘털보네’는 그렇게 어디론가 떠났다. 친구도 사라졌다. 떠난 이 못지않게 남은 이의 가슴도 휑하다. 너나없이 지내던 친구가 없으니, 나의 반쪽도 없다. 나는 반만 남아 있다. 나에게서 강제로 다른 나인 벗을 떼어내 알 수 없는 곳으로 흩어버리는 것은 ‘인간’을 축소하고 부정하는 일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diaspora)는 마음의 문제이자 인간 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위 시를 유이민(流移民) 시, 즉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해석한 문학연구자 윤영천은 이렇게 말한다.
유민(流民)이란 정치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제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일종의 ‘국내이민’으로서의 유랑민과, 혹심한 정치적 탄압 등의 이유에 따른 ‘국외 유이민’을 모두 포괄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다. 예컨대 조선정부의 말기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봉건관료들의 혹독한 가렴주구에 못견뎌 만주⋅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해 간 수많은 ‘유망민(流亡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한층 심화⋅확대된 격심한 경제적 곤핍과 강도 높은 정치적 박해의 산물인 집단적 유이민 그리고 항시 이러한 신분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농촌 빈민, 화전민, 도시 노동자, 도시 빈민으로서의 ‘토막민(土幕民)’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마침내 해방이 되어 ‘털보네’처럼 타향을 떠돌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국, 필리핀, 일본,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는 무려 300만 명에 달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 중에 제집을 다시 찾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리에서, 임시로 마련한 움막에서, 다리 밑에서, 역전에서 겨우살이를 해야만 했던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해방 3년간 조선을 대치통치한 미군정은 이들에 대하여 어떤 대책을 세웠고, 또 무엇을 시행했을까? 그들은 겨우 시늉만 냈을 뿐,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946년 12월 26일, 서울의 종로청년회관 안팎에 모인 전재동포들 앞에 32세 먹은, 작달만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섰다. 뭘 하려는 사람일까, 왜 저 앞에 서 있을까.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두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조금 떠는 듯 우두커니 서 있다. 웅성거리던 수백의 사람들이 이윽고 조용해졌다. 그 고요한 잠깐의 정적을 깨고, 마침내 투박한 목소리가 한 음절 두 음절, 나직하면서도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제목은 「하늘만 곱구나」라고 했다.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구려 혹혹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 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늘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가 ‘털보네’처럼 집을 버리고 떠났다가 이제 겨우 멀리 만주에서 돌아왔으나 ‘집’이 없고, ‘고향’이 없다. 깊은 서러움을 참아가며 타향에서 갖은 고생을 겪고서 돌아왔건만, 맞이하는 ‘사람’조차 없다. 조국엔 아무것도 없었다. 모리배들이 들끓었다. 거리거리엔 굶주린 이들이 퀭한 눈으로 떼 지어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녕 조국은 ‘해방’되었는가.
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 그 처지를, 자신들의 처지를 가만히, 그러나 분명하게 읊조리고 있다.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하고, “배추꼬리 씹으며” 하고,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하고 배고프고 집 없는 이들을 향해 이 사람은 시를 읊는다.
굶어본 사람이 굶는 이의 처지를 잘 헤아리듯이 가난한 시인 하나가 이 가난한 전재동포들에게 노래 같은 말을 붙인다. 그의 ‘노래 같은 말’ 또는 ‘말 같은 노래’를 들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속울음을 하거나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깊이 한숨을 내쉬거나 했을 것이다. ‘노래인 말’이 끝나고 박수치며 저 사람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나’와 다르지 않은 이, ‘나’의 처지를 헤아리는 이, 기꺼이 아무것도 없는 ‘나’의 곁에 오래 있어 줄 이로 생각했을 것이다.
장차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알 수 없고 뚜렷한 방도 또한 떠오르지 않지만 저 이가 말하고 노래하는 ‘나’의 처지를 다시금 곱씹고, 크게 숨을 고르고, 눈물 어린 눈을 부릅떴을 것이다. 몇 줄의 ‘시’가 뭉근히 가슴 속에 들어와 마음을 몽글거리게 했을 것이다. 아주 미약하지만, 그것을 지팡이 삼아 다시 제3의 삶을 일으켰을 것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조국은 더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에 휩싸일 터였지만, 지금은 다시 묵묵히 힘을 내어 살아갔을 것이다.
시인 이용악은 1949년 8월, 조선문화총연맹 서울시지부 활동으로, 이승만 정부에 체포되었다.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이듬해인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 고향인 이북으로 올라간 이후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1971년 2월, 지병인 폐병으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