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5호
충북문화재단 충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카카오톡
에세이비평현장기획
에세이 - 75호
  • 이전 게시글 보기
  • 다음 게시글 보기
‘우정(友情)’에 대하여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소종민

문학평론가, CB-arte 편집장
@

소종민
에세이 (2018년 12월호)
 
박지원과 연암 그룹
 


  연암 박지원은 1737년, 영조 13년에 태어났다. 18세 때부터 우울증이 있어 골동(骨董)⋅서화(書畵)⋅성가(聲歌)를 가까이 하고 해학담과 옛이야기를 즐겼으며, 도가의 양생술에 관심을 쏟았다. 1768년, 32세 때 종로 백탑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선생의 댁 주변에 이덕무⋅이서구⋅서상수⋅유금⋅유득공이 모여 살았으며, 이 무렵부터 그들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른바 ‘연암 그룹’이 시작된 것이다. 35세인 1771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기로 하고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36세 때인 1772년, 홀로 전의감동의 우사(寓舍)에 기거하면서, 김용겸⋅홍대용⋅정철조⋅이서구⋅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 여러 友人文生들과 친밀한 교제 속에 사상과 문학을 심화시켜 나갔다.
  마침내, 연암은 42세 때인 1778년에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승지 홍국영의 모함과 위협을 피해 피신 겸 은둔한 것이었다. 1780년, 44세 때 삼종형 박명원의 권유로 청나라 고종의 70수 축하 사절단이 되어 연행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벗 정철조가 별세하였고, 그 이듬해 벗 홍대용이 별세하였다. 연암은 때때로 열린 과거에 늘 불응하였고, 평생 말단 벼슬아치로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57세 때인 1793년, ‘「열하일기」로 인해 문체의 타락을 초래한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아 답서를 보내어 사죄하였다. 같은 해, 벗 이덕무가 별세하였다. 1797년, 61세 때 면천 군수로 임명되었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였다. 1801년, 벗 박제가가 무고에 의해 연좌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1805년 10월, 지병인 풍비(風痹)를 앓던 끝에 서울 재동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두루 잘 알려졌듯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유사 이래 최고의 중국 여행기이자 조선 후기 북학파의 사상적⋅문예적 성과를 총괄하는 대표작이다. 「열하일기」는 머리말을 빼고 25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은 다음과 같다.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을 기록한 「도강록」, 중국 심양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성경잡지」,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일신수필」,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인 「관내정사」,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 「막북행정록」, 태학관에 머물며 관찰한 기록인 「태학유관록」,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 「환연도중록」, 열하에서 만난 중국 친구들에 관한 기록인 「경개록」 등이 「열하일기」의 초입 부분에 해당한다.
  이후 「열하일기」에는, 라마교에 대한 문답인 「황교문답」, 반선(班禪)의 내력인 「반선시말」, 반선을 만난 「찰십륜포」 등, 사행(使行)과 관련된 문건들인 「행재잡록」, 천하의 대세를 살핀 「심세편」,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인 「망양록」, 곡정과 나눈 필담인 「곡정필담」, 피서산장에서의 기행문 「산장잡기」, 요술놀이 이야기 「환희기」,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 「피서록」,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 「구외이문」,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인 「옥갑야화」, 북경의 이곳저곳에 관한 기록인 「황도기략」, 공자 사당을 참배하면서 쓴 「알성퇴술」,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 간단히 적어둔 메모 모음인 「앙엽기」, 동란재에서 쓴 「동란섭필」, 중국 민간의 응급처방을 기록한 「금료소초」 등의 글이 실려 있다.
  「열하일기」 한 편만으로도 그의 호방함과 치밀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필력은 찬탄과 칭송 못지않게 질투와 견제를 샀다.
  하지만 애써 벼슬자리를 피해 사방으로 떠도는 그의 처지를 곡진히 살펴 어디에 있든 그를 찾아 기꺼이 우정을 건넨 벗들이 있었다. 「연암집」에 실린 「취하여 운종교를 거닌 기록」에는 7월 어느 여름밤, 연암과 그의 벗들이 서로들 술에 취해 지금의 광교 근처에서 벌이는 해프닝이 매우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행인이 끊긴 심야에 홀로 배회하는 개가 어디론가 사라지자, 무관 이덕무가 오랜 친구를 찾듯이 “호백아!”하고 세 번이나 부르고,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는 등의 이야기다. 권모술수에 여념 없는 썩은 무리들을 피해 방외인을 자처하며 떠돌지만 격의 없이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이들의 일화는 애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연암의 차남인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마침 효효재[김용겸]가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왔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걸 들으셨다. 공은 마음이 몹시 즐거워 책상 위의 구리쟁반을 두드리며 가락을 맞추어 「시경」의 「벌목」 장을 읊으셨는데 흥취가 도도했다. 잠시 후 공이 일어나 가가더니 한참 있어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 담헌[홍대용]이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가 감히 법도를 잃어 어르신을 가시게 한 모양이구려.’ 두 분은 함께 달빛을 밟으며 공의 댁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에 이르렀을 때다.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공은 무릎에 거문고 하나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계신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몹시 기뻐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곳으로 옮겨와 공을 모시고 놀다가 흥이 다한 뒤에야 헤어졌다. 아버지는 언젠가 이 일을 말씀하시며 ‘효효재께서 돌아가신 뒤 다시는 이런 운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남다른 감수성을 지녀 어릴 적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연암에게 벗들이 없었다면, 「열하일기」와 「연암집」은 이 세상에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재능과 인간됨을 세심히 살피고 이를 꽃피울 수 있도록 함께 한 연암의 벗들 또한 연암의 다정한 시선과 따뜻한 배려 안에서 저마다 큰 성취를 보았다. 홍대용의 「담헌집」과 박제가의 「북학의」,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와 유득공의 「연려실기술」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가장 큰 성취는 서로에게 베푼 우정(友情)의 실현일 것이다. 그 우애의 향기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곱고 맑게 퍼져나가리라.
게시물이 없습니다.
(28480) 충북 청주시 청원구 향군로 94번길 7    TEL : 043-224-9142~8    FAX : 043-222-5310
메일수신을 원치 않으시는 경우 수신거부를 눌러주세요.
웹진 구독하기 웹진 해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