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560시간의 ‘틔움’
6개월, 190일, 그리고 4560시간.
직업도 나이도 각기 다른 46명의 사람들이 모여, 일 년의 반을 함께 했다. 그들은 왜, 무슨 이유로, 그토록 가열차고, 뜨겁게, 그 순간을 함께 한 걸까?
처음 ‘틔움’ 공고를 보게 된 건 봄의 느즈막 무렵이었다. 삶에 물음표가 가득하던 시기였다. 30대에 학생이 되었고, 학생 신분이 끝나자 20대에도 안 하던 백수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거나 혹은 자신의 위치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친구들, 지인들 옆에 시간을 거꾸로 가듯, 그렇게 홀로 물음표를 짊어지던 때였다.
〈쓸모있는 문화작업장 틔움〉 ‘틔움’이란 이름과 ‘문화’라는 글이 꽂혔었다. 모집 기간 끄트머리에 우연히 이력서를 넣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2. 첫 날의 기억
교육 첫 날, 여러모로 ‘기선제압’당했다.
첫 수업이라 욕심부려 수업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다. 원래부터 주변 환경 따지는 성격이라,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욕심이었는데 나보다 먼저 온 분이 있었다. 그 다음 주엔 더 일찍 도전해봤다. 하지만 역시나 그 분이 먼저 와 있었다. 와... 기선제압이 이런거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분, 단지 회사가 일찍 끝나 바로 오신 까닭이었다. (연우샘, 읽고 있어요? 진짜 놀랐다고요.)
(매일 써 내려 갔던 노트)
멘토분들의 이론강좌 그 첫 번째 초대 손님은 제주문화기획학교 교장 김정이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하는 문화기획은 누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체험’이 아닌 ‘경험’을 남기려는 선배들의 고민이 마음에 꽂혔다.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접근법이었다. 그렇구나. 단발로 휘발되는 행사, 이벤트가 아니라 내가 직접 고민하고 겪어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찾는 ‘단서’를 서로에게 줄 수 있겠구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문화’가 가지는 큰 힘을 느꼈던 날이었다. 이 후 좋은 수업들이 많았지만, 첫 날의 날카로운 그 기억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다. 문화는 다른 이에게 누군가가 베풀 듯 무언가를 선사하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무언가 단단했던 고정관념이 깨졌던 순간인 것 같다. 이러한 고민들이 내 이야기에도 녹아 들었다.
3. “충북혁신도시, 너 참 낯설다”
충북 혁신도시에서 제대로 살게 된 건 작년 12월이었다. 10대의 학창시절, 20대의 직장생활을 고스란히 수도권에서 보냈던 내게 혁신도시는 상당히 낯설었고, 어색했다. 누군가는 히어로물 속 영웅만 살아남은 텅빈 도시에 비유하기도 했다. 공감했다. 한 편으론 씁쓸했다.
2만여명의 사람들이 사는 이 곳엔 문화를 즐길 그 흔한 영화관도, 서점도 하나 없다. 늘어나는 건 유흥업소뿐이었다. 그런 갈증이 층층이 쌓여갈 때 즘, ‘틔움’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교육생이 자신의 기획을 짜 볼 기회였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모든 것이 자유. 그렇게 시작된 나의 기획, ‘내’가 사는 곳에서 시작한 것이 바로 “I, My, Me 프로젝트”였다.
4. I, My, Me 프로젝트
여유없는 삶에 누구보다 ‘나’의 행복에 만족하고자 시작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I,My, Me프로젝트.
(책먹는 DJ 포스터/ 첫 모임 모습/ )
그 첫 번째 ‘I’는 고를 것도 없었다. 나처럼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처음 든 생각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독서모임이었다. 글이 짧고, 글보단 영상을 좋아하는 ‘내’게 맞춰 독서에 ‘문화’를 넣은 독서문화모임이라 정하고, ‘1인시점, 책먹는 DJ’란 이름을 붙였다. 2주간 향유한 소설, 영화, 다큐 등 모든 대중문화 중 하나를 선택, 어울리는 음악을 BG로 깔고 DJ가 되어 회원들에게 소개하는 형식이었다. 포스터를 만들고 포털사이트, 도서관, 오픈채팅방을 만드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홍보를 했다. 첫 모임 날, 내 우려와 달리 나와 똑닮은 혁신도시 이웃들이 모였다. 모두 1년이 채 안 된 사람들. 동등하고 픈 모임의 원칙상 나이와 이름을 모른 채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지만 그들은 나의 12월 우리의 세 번째 모임까지 함께하며 응원해주고 있다. 나라면 결코 읽지 않을, 보지 않을 책, 영화들을 음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니. 이런 게 문화일까?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혁신도시 이웃들‘, 그 중에서도 나의 단골집들을 인터뷰하는 〈이웃소식지〉 in the view도 인터넷 포스트로 발행하고 있다. 짧게는 5분씩, 그들의 소확행과 혁신도시 살아남기 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우리 동네와 친해지기를 하고 있다.
5. 우리는 무엇을 틔웠을까?
기쁘게도 이 기획은 장관상을 받게 됐다. 하지만 딱 다음 날부터 더 많은 고민이 켜켜이 쌓여가는 중이다. 위안이 되는 건 나와 함께 길을 걸어 준 틔움 2기생들이 내게 있다는 것. 첫 만남부터 우리 틔움 2기생들이 좋았다. 20대부터 60대까지, 같은 눈높이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겠는가. 함께 무언가를 틔워보고자 모였던 6월의 우리는 12월 지금 ’함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4560시간, 우리는 조금씩 각자의 속도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문화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꽃이 예쁘게 피워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