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달라질 문화예술의 방향성에 대하여
“ 우리들의 고요한 2020년 ”
축제와 행사가 사라졌다. 거리의 노래도 멈춘다. 사람은 코와 입까지 두껍게 마스크를 눌러 쓰고 말을 아낀다. 각자의 거리는 멀어질수록 좋고, 만남과 모임은 이제 일종의 민폐가 되어 버렸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창궐한 이래, 새로운 십년대라고 불리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2020년은 애석하게도 가장 고요한 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코로나-19 이후의 시대, 포스트 코로나( Post Corona)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와 사회가 위축된 이후에 찾아올 사회는 예측할 수 없지만, 그저 낙관할 수는 없다는 것은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화예술계는 치명적인 직격타를 맞았다. 본디 문화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되고, 예술은 그것을 보고 향유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완성되는 법. 코로나-19는 지금까지 문화예술을 존재하게 했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말라붙게 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도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인간을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했던가, 예상치 못한 변화 속에서
문화예술계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각자만의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조금씩 달라져 가는 문화예술계의 모습 속에서 앞으로 도착할 그 미래의 모습을 과감히 말해본다.
“ 코로나-19,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다. ”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저서, 「데미안」의 구절이다. 아마 해당 책은 읽어 보지 않았더라도, 이 구절은 많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시대의 특이점이 도래하면 이 문구는 어떤 식으로든 매체에 등장한다.
그만큼 새로운 변화는 과거에 있던 무언가의 파괴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19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달갑지 못한 변화였지만, 어찌 됐든 이것은 기존의 문화예술계의 흐름을 파괴 시켰다. 그리고 이에 많은 이들은 적응할 방법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코로나-19 감염을 피하기 위해 공연과 연주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선보이기 시작했고,
전시와 관람도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이렇게 달라진 것을 궁여지책이라고 하지만, 소위 말하는 ‘90년대’ 출신의 필자의 눈에는 다소 다르게 다가온다. 이것은 어쩌면 문화예술계에 찾아온
새로운 분기점일지도 모른다.
과거 문화예술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감당할 재력이 있는 특권층들이었다. 그러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범위는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당장 80년대만 해도 스타가 되고 싶다면 자본의 집약체인 음반 회사와 방송국의 지지가 없다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 장비를 준비한 뒤 유튜브 계정만 개설하면 누구라도 스타의 등용문에 들어설 수 있다. 인터넷과 기기의 발달이 자본의 한계를 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기술의 발전이 더해지면서
공간과 시간의 한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지금 바빠 놓친 공연이나 연주를 퇴근 후에 느긋하게 몰아 볼 수 있고, 당장 갈 일이 막막한 먼 거리에서 진행된 것도 지금 손가락질 몇 번이면 볼 수 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방인에게 이것만큼 반가운 일도 없다.
자유롭고, 편리하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저렴하게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다. 이것만큼 현시대를 잘 나타내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현장의 생생한 무게감은 전달하기 힘들다. 하지만 당장 바쁜 현대인으로서는 현장감보다 편리함을 찾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객이 오지 않는 무대를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을 전통의 답습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이 떠난 절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가 되기 마련이다. 중이 오고 싶은 절이 되어야 신도도 오고, 나그네도 오고, 모두가 찾아오는 명소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는 무대에 바퀴라도 달아 관객을 찾아 나서야 하고, 코로나-19 여파는 그 등을 과감히 떠밀었다. 전국 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코로나-19 관련 사업은 변해가는 이 시대가 내디딘 첫발자국인 셈이다. 그 시작이 유쾌 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 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분기점에 도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 모든 새는 각자만의 방법으로 날아오른다. ”
“텔레비전은 6개월 정도 지나면 시장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보는데 지겨움을 느낄 게 분명하거든요.” 영화사 20세기 폭스의 사장이었던 대릴 자눅이 1946년 했던 이야기다. 당시 텔레비전이 막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 몇몇 영화 관계자들은 대형 스크린에 비교하면 조그맣기 그지없는 텔레비전을 비웃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준 높은 관객이 텔레비전에 싫증을 느끼고 기꺼이 영화 스크린 앞에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정확하기 빗나갔고, 저 발언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대표적인 어록으로 남았다.
이처럼 시대와 기술의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문화예술을 이끈다. 코로나-19 탓에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우르르 내몰리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코로나-19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이를 극복하다 못해 이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이 일을 계기 삼아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몇 보 더 일찍 진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감히 여기에 낙관적인 희망을 걸어봐도 되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무지와 객기의 발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우려와 불안 속에 있을 때,
한 명 정도는 희망을 내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이미 알은 깨졌고, 새는 날아야 한다. 허둥거리든, 낮게 날든, 뒤뚱거리든, 쉬었다가 날든 말이다. 모든 새가 각자의 방법으로 날아오르듯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 속에서 이 땅의 모든 문화예술이 자신만의 하늘을 찾길 감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