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가 운영하는 책방을 자주 방문하는 초등교사로부터 안타까운 하소연을 들었다. 농촌이 좋아 귀촌을 선택한 선생님은 틈날 때마다 학생들에게 괴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인지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자 한 학부모님이 교사의 이런 말들이 불편하다며 전화를 해왔다. 아이들에게 시골이 좋다는 말은 그만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큰 도시로 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로컬은 이런 곳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애정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심고, 어서 빨리 이곳을 탈출하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임을 각인시켜야 하는 곳. 기껏 도시로 내보내 힘들게 공부를 가르친 자식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하면 손을 내저으며 반대하는 곳. 청년이 유입되지 않는 곳.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과거에 갇혀있는 곳. 그러나 이렇게
소멸해가는 지역문화에 꽃을 피우고, 마을을 되살리고, 앞으로의 시대는 ‘로컬이 미래’라는 걸 구현해보이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 괴산에서 주민 주도 협동조합인 ‘느티울여행학교’를 만들고 마을문화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김현숙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도시에서 살다 각자 괴산으로 귀촌해서 만난 동갑내기 김현숙과 백창화는 의기투합하여 괴산을 새로운 문화예술 관광 명소로 만들어보자 하고 있다.
‘마을문화 디자이너’라는 직함이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할 건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 건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 제 별명이 ‘마실러버, 마을러버, 오지라퍼’예요. 이 세 단어 안에 제가 지향하는 게 다 들어 있습니다. 제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해요.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에 살러 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곳곳에 재미난 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개성있고 재능 넘치는 분들도 많고요. 그런 분들이 서로 만나 협업해서 의미있는 일을 해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면
마을이 살아나고, 이웃과 관계가 회복되고, 지역의 색을 담은 문화가 만들어지겠다 싶어서 스스로 ‘마을문화 디자이너’라 이름을 짓고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김현숙님과 대담을 나누는 저도 그렇게 해서 지역 주민으로 만나게 되었죠. 처음 책방에 오셨을 때가 기억나네요. 시골에 이런 서점이 있다는 게 놀랍다고 하시면서 지역에서 함께 가꾸고 보살펴야 할 곳이라고 말씀해주셨지요.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마을문화 디자이너로서 첫 사업의 아이디어도 책방에서 얻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 숲속작은책방은 저한테는 좀 놀라운 곳이었지요. 아니, 이런 시골에 서점을 열고 책을 팔겠다고 하는 이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배짱이 좋은 거야, 이런 생각을 했었지요. 책방지기 부부 소개로 쇠락해가는 시골 마을을 책으로 부흥시킨 유럽 책마을 사례를 알게 되었고, 이곳과 교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2018년, 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기획한 지역우수문화콘텐츠 발굴사업에 공모신청을 냈는데 선정돼 8,900만원 사업비를 받았지요. <한지, 소리를 담고 바람에 날다>라는 프로젝트였어요. 괴산에서 3대째 한지를 만들고 있는 충북무형문화재 안치용 장인과 지역 전통예술인, 생활문화예술인들이 방문단을 꾸려 프랑스 농촌 마을에 갔고 공연과 전시를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고 왔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이미
지역에 자리잡은 생활문화 예술인들이 뜻을 갖고 모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풍성한 문화예술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지요.
이 사업의 가장 큰 성과는 군에서 하향식으로 내리꽂는 문화가 아니라 지역 주민이 먼저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제안하는 사업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일 것 같아요. 민관협력의 이상적인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 것이죠. 괴산군에서도 이런 점을 높게 평가해서 후속 사업을 계속 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죠?
- 처음에 괴산군에 프로젝트를 들고 갔을 때는 김현숙이라는 한 개인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과연, 지역 주민 역량만으로 이렇게 큰 국가 공모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반신반의했었죠. 그런데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주무 기관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자 다음 해에는 오히려 저에게 지역의 생활문화 콘텐츠 개발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느티울여행학교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진행하는 사업이 2019년부터 올해까지 2년 연속 진행하고 있는 “연풍, 바람 따라 신나는 숲여행” 프로젝트입니다. 그 안에 ‘얘들아, 숲이 부른다’ 라고 하는 숲놀이 체험 프로그램이 있고 ‘엄마, 오늘은 숲이 참 예쁘다’ 라는 일상예술 감성여행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로컬’과 ‘문화예술’을 중심에 놓고 콘텐츠를 개발하며 지역 활동을 해온 지 3년이 되었네요. 성과도 있었겠고, 아쉬운 점도 있었을 텐데 중요하게 짚어보고 싶었던 점들을 말씀해주세요.
- 대개 지금까지 지역에서 수행하는 문화 프로그램들을 보면 외부 관광객들을 하나라도 더 끌어들여 우리 지역에 수익을 내자 라는 단순한 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이 부분을 짚고 싶습니다. 첫째로
지역 문화사업은 그 사업을 수행하는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역과 마을에 대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괴산군에 연풍면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자연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삶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려면 무엇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둘째로 지역 주민이 서비스를 단순히 제공하는 입장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지역 문화예술가들이 스스로 즐거워야 합니다 그럴려면 셋째로,
이 일이 본인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자체의 지원이 필요한 거죠. 지역의 관광문화를 기획할 때 지역주민과 관광객의 관계가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의 상하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먼저 이 문화를 만들고 즐기는 주체가 되어야, 지역에서 기획되는 모든 문화 관광 프로그램이 지속성을 갖고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느티울여행학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을 통해 지역주민의 역량을 강화하고, 마을에 콘텐츠가 쌓여가는 걸 최우선 사업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현숙 님의 말씀은 어쨌든 지역 주민이 주체적인 힘을 갖고 콘텐츠를 쌓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일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숲속작은책방과 산막이옛길이 협업한 ‘유람책선’ 프로젝트는 매우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동네 책방은 작가를 초청해서 질 높은 문화 콘서트를 기획하고, 산막이옛길은 단순히 자연을 즐기며 걷는다는 트레킹 외에 책문화 라는 새로운 관광 콘텐츠를 갖게 되었죠. 이걸 한 구슬로 꿰어낸 것이 바로 느티울여행학교이고요.
- 제가 가장 원하는 그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역에 책방이 있어요. 책이 팔리지도 않는 어려운 사회에서, 지역의 독서문화 계발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요. 바로 옆에는 산막이옛길이라는 천혜의 관광자원이 있습니다. 자원은 너무 훌륭한데 핵심 콘텐츠가 없어서 해마다 관광객이 줄어들어요. 이 지점에 우리 ‘느티울여행학교’의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책방과 산막이옛길을 엮어서 새로운 관광 콘텐츠를 만들어냄으로써 주민, 관광객, 지자체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거죠.
천혜의 절경에 유람선을 띄우고 그 안에서 시를 읽고 공연을 하는 새로운 문화 풍류. 얼핏 생각해도 낭만과 교양이 넘치잖아요? 파일럿 프로그램처럼 소규모로, 2회에 걸쳐 참가자를 모집했는데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냥 걷는 길은 대한민국 전역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작가와 함께 걷고, 작가와 함께 배를 타고, 작은 콘서트를 즐기는 이런 프로그램은 전국에 최초입니다. 이로써 산막이옛길은 ‘유람책선’이라는 고급 콘텐츠를 하나 얻었고, 숲속작은책방은 지역에 질 높은 책문화 프로그램을 보급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지요.
김현숙 님은 미국에서 오래 유학했고 글로벌 기업에서 전문가로 일하셨잖아요. 그래서인지 기본적으로 업무 역량도 뛰어나지만 일을 추진하는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느껴요. 마을문화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해나갈 과제 혹은 꿈이 있다면 뭘까요?
- 저도 사실은 이전까지의 저를 내려놓고, 괴산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는 새내기라고 할 수 있어요. 대단치 않지만 제가 쌓아왔던 역량들을 토대로 이곳에서 저도 행복하고, 더불어 지역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궁극적인 일은 무엇일까, 계속 찾아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목표는 분명히 있어요. 저희 협동조합이 ‘여행학교’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농촌에서 꿈을 찾고 싶은 청년들에게 제 경험을 전달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소년들이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도시로만 향하는 게 안타까워요. 도시로 간다고 모두에게 성공과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지역에서 좋은 일자리와 문화 기반을 만들어준다면 요즘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농촌에, 서울 말고도 우리 지역에 미래가 있다는 걸, 열정만 있으면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그의 소망에 응답이라도 하듯 프로그램을 함께했던 한 참여자가 ‘젊은 느티나무 같은 선생님’의 열정에 감동받았다며 박남준 시인의 시를 보내왔다. ‘까치들이 둥지를 틀고/사람의 마을에 희망의 일들을 전하는/나의 이름은 언제나 젊은 느티나무’라는 싯귀가 우리들 가슴에 와 닿았다.
이미 오래 전, 우리들 곁에서 사라져버린 ‘마을’을 찾아 농촌으로 왔지만 이곳에도 우리가 찾는 ‘마을’은 없었다. 그러나 그 없어진 자리에 새로 터전을 꾸리고, 함께 모이고, 소통하며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열정과 노력은 다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곳에 작은 책방을 열고, 누군가는 여행학교를 열었다.
함께 만난 자리에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이야기하고 희망의 싹을 틔워보자 손을 잡았다. 이런 작은 실천과 희망의 몸짓이 ‘로컬의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