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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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고장 영동에 뿌리내린 전통연희단, 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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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호

대전에서 태어나 2002년 부터 옥천에서 옥천신문 기자로 활동함. 지역과 농업, 농촌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있고 풀뿌리 민주주의와 사회적 경제, 건강한 지역 공론장인 지역신문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생각함. "인파출명 저파비"를 금과옥조로 사람이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함. 옥천에서 무지렁이로 무명씨로 살고싶은 사람.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생각함. 사람을 생명으로 등치시켜도 무방함. 자치와 자급, 그리고 연대, 순환과 공생
minho@okinews.com

황민호
전통연희단 천고, 손광섭 대표
 

토박이 청년 손광섭, 중학교 때 배운 풍물로 다시 고향에 오다
전통연희단 천고, 국악의 고장 영동에서 뿌리내린 지 벌써 9년째
학교와 주민자치센터 풍물 강습하면서 매년 업그레이드된 공연 선물
변방 지역의 문화를 젊은 풍물로 일궈내다

고향에 다시 돌아오기란 쉽지 않다. 익숙함은 편안함으로 전이되기도 하지만,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향수의 긍정적 효과일 뿐일 수 있다. 잠깐 쉬는 것과 삶터를 다시 옮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5일간의 일상을 보내는 문제와 주말 동안 1박2일 다녀오는 것과의 차이인데 단순하게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 뿌리를 내리는 거점이라고 여겨지면 고민거리가 다시 많아지기 시작한다. 사실 그쯤 되면 기억과 관계가 선택을 좌우한다. 좋은 기억과 자석처럼 끌어들일만한 사람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더군다나 예술을 하는 사람이 지역 농촌에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들어오는 것과 진배없다. 배움도, 기회도, 일자리도 전부 다 만만찮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꽹과리 치고 붓 들면 밥 빌어먹기 십상이라는 말이 여전히 횡행하는 지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고향 출신은 프리미엄이 있는 게 아니라 외려 한 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제깟 놈이 잘 났으면 서울로 가지, 지역에 다시 왜 돌아왔간 하며 환영과 격려는커녕 한 수 접어보는 분위기가 허다하다. 고향은 항상 푸근하고 따스하진 않다. 그건 오지 않은 사람들이 퍽퍽한 도시생활에서 위로받고 싶은 신기루 같은 환영일 수 있다. 녹록지 않다.

서설이 길었다. 영동읍 계산리 당말이 올라가기 전 삼거리식당 둥구나무집이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이다. 전통연희단 천고 손광섭(36) 대표는 이수 초등학교와 영동중, 영동고를 나온 말 하자면 지역 토박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그는 2012년 영동으로 내려와 전통연희단 천고를 창단했다. 맨 처음엔 젊은 20-30 대 15명으로 시작을 했지만, 지금은 같이 타악을 전공한 아내 김지혜 씨와 둘이서 천고를 꾸려가고 있다. 벌써 9년째다. 살아남기 위해서 버티었다. 하나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고 주민자치센터를 찾아다니며 고향 사람들에게 풍물을 전수했다.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풍물을 하던 도반들과 인연을 유지하고 본인의 실력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며 해마다 공연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큼지막한 대고를 가운데에 두고 웅장하고 조화로운 북소리는 보고 듣는 사람을 떨리게 만든다.
 
2017-2018 <연희꽃 흐드러지다>


2014년 첫 공연을 시작으로 2015년엔 판굿을 무대에 올려 환호를 받았고, 2016년에는 울림이란 타이틀로 역동적인 사물과 북의 대향연, 신명나는 상모돌리기로 관객의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2017년에는 <연희꽃 흐드러지다>란 공연으로 삼도사물놀이, 설장구, 아쟁산조, 판굿, 버꾸춤으로 무대를 찬란하게 빛냈다. 2019년 공연한 <마은가리 물가리>란 작품은 충청도 두레풍장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창작공연이다.
되도록 지역색을 갖춘 창작공연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동군에서 운영하는 난계국악단 이외에 민간에서 손광섭 대표가 이끄는 전통연희단 천고가 있다는 것은 영동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원이다. 타악으로서 이만한 자원이 스스로 지역에 뿌리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생계 때문에 김천시립국악단원으로 잠시 활동한 적도 있었다. 활동하면서도 월급의 대부분을 연희단 운영에 꾸릴 정도로 연희단 천고는 그가 지켜야 할 정신적 유산이었다. 그는 어떻게 풍물을 시작하게 됐고 고향에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연히 시작한 풍물, 선생님이 잡아끌다


그래도 그가 고향행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택한 것은 앞서 서술했듯이 좋은 기억과 아직 남아있는 관계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꽹과리를 죽어라 쳤어요. 당시엔 청소년연맹 아람단인가 누리단인가 거기 들어간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풍물반도 겸한다는 거예요. 이게 뭔가. 나갈까 하다가 타이밍을 놓친 거죠. 당시 현주숙 선생님이 같이 하자고 강하게 끌었고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던 것 같아요. 정말 멍하니 있다가 하게 됐어요. 선생님이 정말 좋았어요. 같이 신나게 치고 놀고 정말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학교에 풍물반이 없는 거예요. 당시 중학교 때 같이 풍물 했던 누나들이 ‘너 왔으니 이제 여기서도 풍물반 만들자’해서 같이 만들었죠. 우연히 중학교 풍물반 선생님이 고등학교로 마침 전근을 오셨어요.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끊어질 뻔한 풍물동아리는 이어졌다. 운명인지도 몰랐다. 본인을 풍물로 이끌어 준 현주숙 선생님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은사다.

 

현주숙 선생님이 전교조 활동을 하셨는데 여차저차한 탄압을 받으셔서 인근 옥천으로 전근을 가셨어요. 그 뒤로도 계속 연락을 했는데 9년 전 암으로 세상을 뜨기 일주일 전에 통화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요. 당시에는 잘 기억을 하지 못했을 때였다는데 제 이름을 또렷하게 말하면서 ‘나 많이 좋아졌어’이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어요. 그 선생님 신혼 때 4살배기 아이 데리고 같이 풍물 연수하고 그랬거든요. 우리가 아이도 같이 봐주면서 정말 저를 그 길로 이끌어 준 소중한 선생님이었는데...

 
전통악기 사진
 
 

영동국악기 제작촌 이석재 장인을 만나다


선생님이 떠났고 풍물반이 해체 위기에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풍물은 그의 삶으로 훌쩍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그 선생님이 옥천으로 가신 후 동아리를 유지하려면 담당 선생님이 필요했는데 권효심 음악선생님한테 졸랐어요. 제발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니까 이름만 올려달라고요. 그 선생님은 허락을 하셨고 그 뒤로도 인연이 되어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그의 인생을 바꾼 또 하나의 명인이 있다. 그는 바로 영동국악기 제작촌에서 국악기를 제작하는 이석재 장인이다.

 

영동이 국악의 고장이라 하잖아요. 국악기 제작촌이 있었는데 난계국악축제 때 시연장에서 제가 장고를 한번 쳐보고 싶어서 열심히 쳤어요. 근데 당시 악기 장인이 절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느 학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영동에서 중학교 다닌다니까 기특하다고 새장구 하나를 선물로 주시더라고요. 횡재했다 싶었죠. 그때부터 틈만 나면 악기 제작촌에 놀러 가서 일도 도와주고 악기 만드는 법도 배우고 그랬던 것 같아요. 대학교 졸업하고 어디로 가야 되나 고민하는 중에 그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네가 영동 안 오면 영동은 누가 지키나. 두말 말고 오라고. 영동으로 오라고요. 그 말에 훅 끌려 들어왔죠. 모든 고민들을 상쇄시키는 말이었어요. 고향에 대한 좋은 기억도 물론 한몫했겠지요.

 
 

청주대 한국음악과에 진학해 꿈을 구체화시키다

 

고등학교 2학년 말쯤 되면 대학입시 공부 때문에 바쁘잖아요. 저는 동아리에 맛이 들려 열심히 하고 싶은데 동아리 회원들이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지더니 거의 아무도 안 나오는 거예요.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요. 공부한다고 못 할 것 같다고 다 하나같이 말하는데 부아가 치밀어 ‘너네들 열심히 공부해서 다 서울대 가라’라고 말하면서 혼자 동아리실에 와서 장구를 1시간 남짓 열심히 쳤던 것 같아요. 땀은 뻘뻘 나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신나고 재미가 있었어요. 미워하는 마음도 속상한 마음도 전부 사라졌지요. 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저도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길로 나가볼까 그럼 행복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요.



그래서 그는 청주대 한국음악과에 진학을 하게 됐다. 청주대 한국음악과는 국악의 양대 산맥이었던 장사훈 박사가 있었다. 서울대 이해구 교수와 쌍벽을 이루었던 곳으로 당시에 국악 하면 서울대 아니면 청주대였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당시에 예고 졸업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잘 봐주셔서 그랬는지 붙었어요. 그런데 학교 들어가서 엄청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예고 학생들은 이미 다 배웠더라고요. 근데 저는 사물놀이 밖에 안 해서 화성학도 모르고 정악도 모르고, 상모 돌리는 것도 몰랐거든요. 정말 따라가느라 고생 많이 했죠. 그런데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2020 <영동에 살어리랏다>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고향에서 연주하는 것이 행복하다


뿌리를 내린 만큼 살림살이가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퍽퍽하지만, 이제 떠날 수 없다.

 

고향에 온 지도 벌써 9년이 되었네요. 졸업하고 와서는 1년 수입이 600만 원 정도 되었네요. 다시 떠날까 하는 생각 왜 안 들었겠어요. 그래도 지역 아이들 가르치면서 주민들 교습하면서 벌은 돈으로 지역에서 공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수입이 많지는 않지만, 뭔가 살아간다는 느낌으로 하고 있어요. 오래된 낡은 건물에 있지만 번듯한 연습실이 있고 한번 모이자고 하면 전국에 있는 친구들이 다 모여서 같이 공연 준비도 해주니까요. 그 맛에 한달까요. 그리고 고향에서 제자들 기르는 재미가 쏠쏠해요. 찾아오고 연락하고. 나쁘지 않아요.



아직도 영동군은 여전히 딱딱하고 잘 모르기도 해서 약간 홀대받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런 것쯤은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이미 초연한 듯 보였다.

 

알아봐달라고 지역에 온 건 아니니까요. 천천히 스며들고 번지면서 뿌리내리고 있는 거죠. 원래 내 자리에 온 것 마냥 편안하고 좋아요.



원래부터 척박한 토양이란 없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갈고닦아 옥토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 있다. 짜여진 프레임과 시스템을 거부하고 척박한 토양을 일궈가는 과정도 재미로 느끼는 것 같았다. 땅을 뒤엎다가 생채기도 나고 할 터이다. 하지만, 새로 바뀐 토양에서는 씨앗이 더 자리를 잡고 단단히 뿌리내릴 것이다. 이런 무명의 헌신이 있기에 척박한 지역 문화는 가느다란한 생명줄을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짜여진 틀로 유스팀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홈 그로운 시스템’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체계적이진 않지만 특유의 관계성으로 그가 민들레 홀씨처럼 자리 잡았듯이 누군가 그가 던진 한마디 말과 일상의 가르침을 얻고서 다른 방식으로 또 지역에 자리 잡을 거라 생각하니 그냥 절로 흐뭇해졌다. 영동에는 난계국악단 말고도 거친 들판에 스스로 자리 잡은 전통연희단 천고가 있다. 그 안의 씨앗인 손광섭 대표를 아무래도 기억해야 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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